정확히 언제였는지 누구의 말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저에게 딱 기억에 남아 있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면서, 활동하면서 보니까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더라. 단적으로 말해서 삼성전자 들어가서는 거기서 노조 만들다가 탄압당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대학을 간다, 어디에 취직을 한다 그런 걸로 너무 뭐라고 하지 말자. 어디에서 무얼 하든 더 잘 살도록 곁에서 잡아 주는 사이로 남는 게 중요한 것 같아.” - 아마도 같이 활동하던 이들의 대학 진학 등을 두고서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주제로 한창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활동을 해 온 활동가가 한 이야기였지요.
인권활동가들은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고민하지만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도 고민합니다. 소소하게는 노동 탄압 또는 생태계 파괴 등으로 불매 운동 대상이 되는 기업의 상품을 살 것인지부터, 크게는 대학에 갈 것인가, 어떤 진로를 택할 것인가, 누구와 어떤 가족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까지 모두 고민과 선택의 주제입니다.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사회와, 세상과,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올바른 삶, 좋은 삶의 기준을 생각하고 토론하고 평가하는 일이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며 사는 건 너무 답답하고 피곤하지 않냐고요? 인권운동이란 게 개인의 자유를 옥죄는 건 아니냐고요? 저는 그건 다분히 오해라고 답변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활동가 개개인의 생활에 대해 ‘이래야만 하고 저래선 안 되고’ 하는 데 집착하는 것은 별로 ‘운동적’이지가 않습니다. 사회운동은 사회를 바꾸려는 조직적 실천이고, 개인의 생활에서의 실천도 그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실 크게 중요치도 않은 수단이지요. 조직적인 정치여야만 하는 운동을 개인적인 도덕 문제로 바꿔치기해 버려선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인권운동은 당신을 인권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만들고 인증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논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차별적이고 불의한데,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일지 고민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요컨대 활동가들은 자신의 삶도 운동적인 평가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답과 오답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답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는 운동의 가치관과 목적의식을 내면화한 활동가에겐 자연스러운 노력일 테지요.
또 한 가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운동에 필요한 각종 역량을 갖추고 365일 휴식이 필요없는 만능의 활동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지요. 삶의 방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취향과 적성 문제이든, 환경의 문제이든, 꿈의 문제이든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깊이 있는 공부 및 연구를 갈구할 수도 있고, 대학을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꿈꿀 수도 있지요. 그런 이유로 대학을 가는 게 자신의 행복에 필수적이라면 어쩔 수 없죠. 제가 갱생불가의 오타쿠라서 성차별적인 일본 소년만화를 낄낄대며 보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것도 그런 류의 문제 아닐까요?
다만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뻔뻔해져선 안 될 일입니다. 가령 제가 자기합리화를 위해서 제가 보는 만화가 성차별적 요소가 없다고 강변하거나 개인의 취향일 뿐이니 비판하지 말라고 회피해서는 안 되겠죠. 대학에 가더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될 기득권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지며, 학력·학벌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라는 말에도 이런 고민이 녹아 있습니다. 돌아보니 제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이 말이 잘못 쓰일 위험성도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무슨 선택을 했든, 어떤 일을 하든 마음속으로는 인권운동/진보의 뜻을 품고 있으면 된다’라는 식으로 쓰일 위험성입니다. 노동법을 무시하는 자본가나 입시비리를 저지르는 상류층이 되어서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단 이유만으로 ‘나는 사회주의자, 좌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여럿 봐서 더 그런 걱정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사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에 따라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도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기에, 자기 자신이 설 자리를 결정하는 것 자체도 평가받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무엇을 하며’ 사는지는 넓은 의미에서 ‘어떻게’ 사는지의 일부이니까 말이죠. 인권운동이 개인의 도덕적 삶을 위한 게 아니란 말이든,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든 사후 정당화나 변명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 '공현의 투덜리즘'은 예전에 공현이 함께 만들었던 〈오답 승리의 희망〉의 간판 코너명이었는데요. 오승희를 기리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 사진 설명 : 대학입시거부설명회